요즘 각자 일이 바쁜 저희 가족은 좀처럼 서로 얼굴 보기가 힘듭니다. 운이 좋게 시간이 맞은 토요일 저녁, 저희 가족은 식탁에 둘러 앉았습니다. 선풍기는 목이 돌아가며 열기를 식혀주고 아버지 옆에는 얼음이든 위스키가 있습니다. 더위를 조금이라도 식히기 위해 어두운 집 안 식탁 위 노란 전등만 켜있습니다. 더운 여름날입니다.
아버지 옆에 있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위스키는 얼음이 녹아 차갑지만 목을 타고 내려가면 서 뜨거워 지더니 가슴 속을 덥혀줍니다. 기분 좋은 취기와 함께 제 마음 속 한 구석을 잡고 있는 불안감에 대해 털어놓았습니다.
"요즘 생각이 너무 많아. 생각이 많아서 하나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해. 불안감을 없애려는 듯 자꾸 뭔가를 하려 하지만 뭔가를 하려고 할 수록 더 늦춰지는 기분이야. 내 나이 때가 다 그런걸까? 취업준비하는 친구는 자소서를 쓰면서 내가 이렇게 헛살았나 생각이 들었데. 한강에서 세시간 동안 흘러가는 강물만 보다 집에 왔다 더라고 . "
아버지와 어머니는 약간은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만 곧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런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우리끼리 얘기한적있었어. 고민을 말할 수 있는 자리 말이야. 우리가 너의 전공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가 얘기해줄 수 있는 건 이건거 같아.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게 참 중요한 거 같아. 어차피 미래에 뭐가 유망할 지는 알기힘들어. 그렇다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비슷한 말씀을 하신 교수님이 있었어.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 그거 진짜 어려운 일이야.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 지 모르겠어. 혹은 이런 생각이 들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공부가 재밌다고 일도 재밌다는 보장이 있을까? 좋아하는 일을 찾았는 데 재능이 없다면? 그래도 그 일을 해야될까."
더운 온도에 위스키 잔에는 물방울들이 땀방울 마냥 맺혔습니다. 아버지는 위스키를 더 따랐습니다.
" 맞아. 좋아하는 일을 찾는 건 쉽지 않아. 하지만 네가 조급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살다 보면 막상 부딪혀 보기 전까진 알 수 없는 일들이 많더라고. 너가 지금 뭘 하고 싶은 지 모르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거야. 나중에 직접 부딪혀 본다면 뭘 좋아하는지 감이 잡힐거야. 중요한 건 태도라고 생각해. 계속 너가 하고 싶은 걸 찾으려 노력 한다면 언젠가는 찾게 될거야."
머릿속이 조금 정리가 되면서 내가 지금 해야될 일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뭐 였지. 내 꿈이 뭐였지. 무엇이 날 움직이게 했지.'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셨습니다. 위스키는 목을 타고 내려가며 뜨거워지더니 한 동안 꺼져있던 작은 불씨를 다시 키웠습니다.
사람은 종종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자기 꿈이 무엇이었는 지도 잊어버립니다. 모르는 사이에 제 꿈은 취업 그 자체가 돼버렸어요. 그냥 남들한테 그럴듯한 말 한마디가 하고 싶었나 봅니다. " 나 어디 대기업에 취직했어." 그 다음은? 그 다음의 그럴듯한 말 한마디를 찾아 봐야겠습니다. 음, "나 이번에 BMW 신형 뽑았어." 정도면 괜찮을 거 같네요.
제 안에는 남들과 나를 비교해 가며 내가 나답게 사는 걸 방해하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너는 땡땡이보다 몇 년 늦어. 쟤는 취업을 해서 돈벌고 다니는 데 너는 뭐 하냐. 땡칠이는 고시 합격했다더라." 어쩌겠습니까. 헛짓거리를 하고 재수하고 휴학하고 유럽여행을 간 것도, 그 모든걸 다 합쳐야 나란 인간인데 말입니다. 이 방해꾼들은 자꾸만 제 목표를 헷갈리게 합니다. 내 안에 불안감을 심고 나를 근시안으로 만듭니다. 이유나 목적 따위를 묻지 못하게 하고 작은 기쁨들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저 채찍질을 해가며 앞으로 달릴 것만을 강요합니다. 풍경은 빠르게 바뀌고 많은 것들을 스쳐보냅니다. 그렇게 한 참을 달리다 보면 어느새 혼자 남은 나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겠죠. '내가 어딜가려고 했더라. 무엇을 위해 달려왔더라.'
내 인생을 사는 건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가만히만 있어도 근육량은 줄어들고 이번 학기에 배운 내용이 다음 학기에는 기억나지 않듯이, 내 삶을 살려고 꾸준히 노력하고 채근하지 않으면 그저 관성대로 흘러가게 돼요. 지금 저의 목표는 독립이에요. 부모님으로부터 독립, 가르침으로부터 독립, 후에는 회사로부터 독립. 뒤에서 도움을 받으며 자전거를 타는 것보다 도움없이 자전거를 타는 게 재미있듯이, 독립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자유로움을 느껴요.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나아짐을 느낍니다. 그런 점에서 취업 자체가 목표가 될 순 없어요.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돈은 벌어야지만 후에 내가 회사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살아봐야죠.
어차피 죽으면 먼지로 돌아갈 거 너무 겁내지 말고 너무 불안해하지 않으며 충분히 부딪혀가며 살려고요. 자꾸만 불안하고 남들과 비교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소설 모모의 이 구절을 생각하려 해요.
모모는 거북에게 말했다.
"부탁이야. 좀더 빨리 걸으면 안 될까?"
거북은 대답했다.
"느리게 갈수록 더 빠른거야."
거북은 아까보다도 더욱 느릿느릿 기어갔다. 전에도 그랬듯이 모모는 느리게 감으로써 더 빨리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발 밑의 거리가 스스로 미끄러져 나가는 것 같았다.
느리게 가면 느리게 갈수록 더욱 빨리 갈 수 있었다.
느릿느릿 갈수록 더욱 빨리 갈 수 있으며,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더욱 천천히 갈 뿐이라는 것은 하얀색 구역의 비밀이었다.
-모모, 미하엘 엔데
느릿느릿 여유를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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